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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02 生의 이면(이승우作) - 밑줄 친 문장들 (12.07.02)
보고듣고느끼고2012. 7. 2. 19:21

의 이면 / 이승우

 

299쪽 분량의 책에서 밑줄 친 문장을 모으니, 워드로 일곱장이다. 

※ 추후에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있는 분은 읽지 마시길.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의 밑줄들이므로. 

공개로 돌린 이유는 로그인 안 하고도 보기 위한, 게으름의 소치... 일독을 추천합니다.

 

기억하거니와 고향이란 하나의 산천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관계이다. 인연이다. 그 때문에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p.82)

 -

이 세계가 나의 집이 아니라는 막막함, 그러나 이 세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절망감. 길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나를 위한 길은 아니었다. 집을 갖지 못한 자의 구름 같은 떠돎에 자유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한낱 위안일 뿐이다. 나는 내가 이 세계의 변두리를 한없이 배회하기만 할 것이라는 불온한 예감에 일찌감치 사로잡혀 버렸다. (<벌거벗은 젊음>, 산문집 <행복한 마네킹>) (p.88)

현실이 평범하지 않으면, 의식도 평범해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평범하지 않은 현실을 의식의 겉면으로 그대로 노출해 보이는 평범함을 극도로 증오했다. (p.99)

이 무렵에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라고 하지만, 성실함의 징표 같은 매일매일의 글쓰기는 아니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어떨 때는 하루에 두 번도 썼지만, 어떨 때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적도 있었다. 거기 적은 내용도 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고(그에게는 어떤 하루도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다면 그는 하루치의 일기 말고는 더 쓰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 내면의 수상한 움직임들을 정교하게(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과되지 않은 감정의 과장에도 빠지고) 포착한 것들이었다. 그 내용만으로는 도대체 그날 이 사람이 무얼 했다는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도무지 일기 같지 않은 일기를 썼다. (p.101)

그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외톨이 상태를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그는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 다가가면 그는 잔뜩 긴장하고 뻣뻣해진다.

-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나는 가장 서툴다. 서툰 것을 사람은 용납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빈번하게 상처를 입는다. 궁색한 선택이지만, 그래서 유일한 나의 대안은 사람 곁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참혹하고 질긴 생래적인 외로움은 어쩔 것인가. 하여 나는 나의 물색없는 외로움을 가장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 또한 삶을 속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참혹한 가난과 외로움을 극복해 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대해 비난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비난하는 대신(비난하는 것은 참여한다는 뜻이다) 혐오하거나 기피했다. 말하자면 초월하려고 했다. (p. 108)  

 

나이 많은 여자와의 사랑은, 그렇다, 나에게 예감된 것이다.

모든 예감에 비극의 냄새가 묻어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숙명의 울림 때문이다. 예감은 열람이 금지된 숙명의 세계를 부지불식간에 엿보고 만 자의 머리 위에 그 부정에 대한 징벌로 떨어지는 벼락, 그 벼락 같은 천재지변의 떨림이다. 그래서 숙명은 예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숙명은 비극의 광배를 두르고 있게 마련이다. 숙명적이라는 말이 비극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1

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나는 도마의 편이다.

낭만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이라는 것을 나는 갖지 못했다. 그런 기반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어느 것도 허공에 뿌리를 내리지는 않는다. 요컨대 낭만주의자는 낭만주의라는 일정한 묘상에서 키워져 모종된 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묘상의 모종은 적어도 두 가지의 기관을 몸에 품고 있어야 한다. 그 하나는 아름다움을 취하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움을 수용하는 기능이다… (p. 112)

 

1-2

옛날에 나는어쩌고 하는 투의 자기과시를 곁들인 감상적인 회상이, 회상하는 개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 무슨 의미를 주겠는가. 모든 과거는 기억된 과거일 뿐이며, 모든 기억은 검열된, 또는 취사선택된 기억일 뿐이다. 시간은 독하고, 나의 자아는 너무 많은 층으로 둘러싸인 거대한ㅡ작은 우주다. 층마다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은 그 층에서만 진실이다. 그 모든 층을 관통하는 작살과 같은 하나의 진실은 없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가장 깊은, 또는 가장 높은 층까지 도달하지 않고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깊은 층이나 가장 높은 층에 그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그곳까지 이르러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곳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 그 여러 개의 층들은 왜 있는가.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층들이 맡은 역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 뻔해서 싱겁다. 그것은 왜곡하기 위해서이다. 감추기 위해서이다.

왜곡된 진실이라 하더라도 진실일 수 있을까? 물속에 비친 찌그러진 달, 색안경을 쓰고 보는 푸른 달, 그리고 암스트롱이 찍어 보낸 필름 속의 달, 그것들을 달이 아니면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해라고 말할 것인가, 꽃이라고 부른 것인가. 그것들은 달이 아니지만 달이다.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인 것. 우리의 검열받은 기억 속의 과거가 그러하다. 그것들은 한낱 인상에 불과하지만, 그 인상을 조작된 것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 나는 느낀다. 내 버림받은 시절에 대한 회상은 결국 나의 글을 심하게 쿨럭거리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내 기억의 정수리에 깊숙이 박힌, 그리하여 아마도 두껍고 엷은 내 복잡한 심리기제의 층들을 작살처럼 관통하고 있을, 결정적인 단 하나의 인상만을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할 작정이다. 그것은 한 여자에 대한 인상이고, 또 10대 후반의 한 남자(청소년? 그 단어는 낯간지럽다. 낯간지러운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가 만난 한 여자에 대한 인상이다. …. 그때 그 남자는 자취를 하면서 혼자 살고 있었다. 서울, 욕망이 미로처럼 꾸불꾸불 헝클어진, 아무리 오래 얼굴을 맞대고 살아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인 뜨악한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p. 113~115)

 

 

그때 나는 열여덞 살, 참으로 어중간한 나이였다. 굳이 제도적인 학령으로 따지자면 고등학교 2학년, 그러나 학교 공부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시들하고 재미가 없던 시절이었다. 현실도 이상도 너무 멀리 있었다. 현실은 발붙이기를 허락하지 않고, 이상은 꿈꾸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득한 이상이었고, 비틀거리는 현실이었다.

…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었고, 그래서 늘 행복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은 것은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려는 욕망이 많은 생각을 만든다. 하지만 생각은 생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결핍의 정도는 더욱 심해지고, 세상과의 불화감은 더욱 증폭된다. 그 증폭된 불화감은 또 더 복잡한 생각의 밑천이 된다. 끝도 없는 악순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믿지 않고, 세상은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 (p.116)

 

누군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리 무의미하고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사소한 버릇 하나에도 의식 깊이 잠재된 어떤 동기인가가 숨어 있게 마련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어찌 젊은 시절의 독서 행위를 그렇게 매도하는가. 자학인가? 위악? 아니면 감춤으로써 드러냄의 처제술을 실연하는 것인가? 그런 주장이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굳이 찾자면, 그런 주장에 대한 대답도 물론 없지 않다. 내 게걸스러운 남독의 버릇에 숨은 동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는 피난이고, 다른 하나는 은밀한 수련이다.

그 동기들은 외면상 그럴듯하게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의 동기일 뿐이다. 동전은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두 개의 동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동전인 것이다. (p.118~119)

 

사람이야말로 모든 불화의 주체이고 조건이다.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천적이다. 그러나 나의 참 세상은 또 얼마나 작고 위태롭고 엉성한지. … , 적은 아무 데도 없는데 고통은 도처에 널려있다. …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조그만 문고판 책의 행간에 무수히 그어진 붉은 줄들은 공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공감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예컨데 동지 의식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는 이단의 내가 여기에 또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 (p.122~123)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그들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원하는 것은 나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나는 그 미지의 사람을 향해 동지라고 불렀다. 나는 나와 원형질이 같은 한 사람의 동지, 참으로 간절하게 만나고 싶었다. 저들의 세상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었다. ‘세계가 파멸하는 것과 내가 차를 마시지 못하게 되는 것과 어느 쪽이 큰일인가! 설사 온 세계가 파멸해 버린다고 해도 상관없지만, 나는 차를 마시고 싶을 때는 언제나 마셔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파멸되는 하나의 크고 피상적인 외부의 세계와 차를 마시는 또 하나의 작고 깊은 내면의 세계를 구별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옳다, 하고 나는 그 글이 적힌 페이지 위에 붉은 볼펜으로 적었다. (p.125)

 

나를 끌어당기는 상대는 나와 같거나 나와 다르다. (p.131)

 

진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을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글들은, ‘내 말의 대언일 때만, 진실로 의미를 가진다. (p.139~140)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을 건드릴 때도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한권의 책은 얼어붙은 내면을 깨는 하나의 도끼여야 한다ㅡ는 카프카의 말처럼. 나의 내면을 깨는 도끼 같은 책.)     

 

어떤 일은 예정 없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있게 마련이다. (p. 143)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가장 큰 약점은 진부하고 두고 없는 허사에 너무 많은 지면을 빼앗기고 있다는 데 있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꾸만 멈칫거리는 문장들은 나의 소극적인 의식의 투사이다. 나의 문장들처럼 나의 의식 또한 멈칫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이유를 내세워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독자들은 작가의 내면까지 헤아려 줄 정도로 그렇게 관대하지는 않다. 사정이야 어쨌든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은 흘러야 하고 문장은 앞으로 나가야 한다. (p. 145~146)

 

내 속에는 두 가지의 소망이 병존했다일의 결과는 어떤 욕망이 더 컸는가를 증거한다. (p.149)

 

순수야 말로 가장 큰 유혹이라는 것을. (p.151)

 

p.152 ‘운명에 대하여

 

이름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은 어떤 사물에 대한 가장 제한적인 정의이다.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편의적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별을 통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면 구별할 필요가 없을 때는 어떤가. 구별함 없이도 이미 총체적인 인식에 이르러 있을 경우에 이름을 알고 부른다고 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오히려 그 새로운 이름이 참된 인식을 방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경우가 그랬다.

나는 그녀를 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이제껏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도 나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 그렇다면 그 그녀 또한 참된 그녀는 아닌 거지. 단지 가 알고 있는 그녀인 거지. 그 또한 파편인 거지. ‘그녀의 파편, 무수한 파편들 가운데 하나….. (p.163~164)

 

 

하지만 인생에는 가정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이미 되어진 일에 대해 가정법을 사용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런 뜻에서 말하자면, 그에게 여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다. 그에게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여자를 느끼게 해주지 않았으며, 김종단은 단순한 하나의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그녀에 대한 묘사에는 에밀 싱클레어의 에바 부인에 대한 숭배의 냄새가 난다.

자신의 사랑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뛰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은 그를 받아 주지 않는다. 사랑은 벼랑에서 몸을 던지는 무모한 연인을 받아 낼 능력이 없거나, (능력이 있다면) 그런 식의 시험 대상은 되고 싶지 않아한다. 어느 경우든 비극이기는 마찬가지.

(p.216~219)

 

한곳에서 치켜세워지는 자는 다른 자리에서 내리깔릴 것을 각오해야 했다. 모든 자리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영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사람들은 그 벽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를 가두기 위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부러 이해하지 못하는 척 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벽을 세웠기 때문에 구분이 생겨났다. 벽이 없다면 구분도 없고, 감금 또한 없을 것이다. (p.227)

 

왜냐하면 종교적 위상과 정치적 입장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종교 또는 신에 대한 관계의 어떠함은 다름 아닌 삶에 대한 태도의 어떠함인 것인데, 삶의 태도란 곧 윤리 또는 정치에 대한 입장에 대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228)

 

그러고는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기도실과 도서관이 그곳이다. 그중 보다 아늑하고 더 철저하게 고립적이기로는 기도실이다. ‘는 기도실의 어둠을 사랑하는 편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기도실에서 는 오래 있지 못한다. 기도실은 에게,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갈증날 때 마시는 맥주 같다. 한 잔은 맛있고 시원하다. 그러나 두 번째 잔부터는 쓰고 싫다. ‘는 기도실에 오래 있다 보면 공연히 불편해져서 그만 서둘러 일어나 버리곤 한다. 그래서 도서관이 언제나 의 자리가 된다. … 도서관을 단순히 일자리가 아니라 정신의 피난처, 또는 영혼의 골방으로 삼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p.231)

 

읽기는 하되 영향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게, 종교는, 정치와 마찬가지로, 독서와 탐구의 대상이다. 그뿐이다. 나의 발언은 확실히 불경하다. … 정치에 대해서는 혹시 몰라도, 신학 공부를 하는 인물을 내세우면서 종교를 폄하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게 하는 것은 파격적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아니,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의 말하는 방법은 한층 교묘하다. 그가 신이나 종교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관심은 진정한 의미의 궁극적 관심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언어를 따라 말하면, 그것은 불경한관심이다. 이것은 애당초 종교 따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쪽보다 훨씬 위험한 게 아닐까.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 종단이라는 여자는 자기의 분신에 불과하다자기를 비춰 주는 거울인 그녀에게, 거울인 그녀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그는 사랑을 퍼부었다. 그러니까 그의 그녀에 대한 몰두는 나르시스의 자기애일 뿐인 것이다. …

종교에 체계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일 뿐 아니라 신봉하는 자의 절대적 헌신을 전제로 하고 있는 체계이기 때문에, 합리와 이성의 칼날 앞에서는 당황하게 마련이다. 종교에 몰두한 자는 전부를 본다. 전부를 보는 자는 부분의 결함에는 눈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를 해부하는 자는 부분을 본다. 부분을 보는 자는 부분의 결함에 눈이 가면 끝내 전부를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봉자에게는 모든 것이지만, 해부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 해부자의 분석은 물론 틀리지 않지만, 그리고 그 분석에 가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진실이고, 부분적인 가치이다. 그리고 과학ㅡ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의ㅡ이 얻어 낼 수 있는 진실이란 언제나 부분적이다. 사람은 해부하지 않고 보아야 한다. 전체를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결국 동굴이 지성소는 아닌 것이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지만, 어떤 집단에 끼어든다는 게 미덥지 않았어요. 아무리 정당하고 고상한 명분과 이념으로 치장되어 있어도아니, 미덥고 말고가 아니라, 어쩐 일인지 그게 쑥스럽고 부끄럽게 여겨져서 잘 되지 않았어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패거리를 만들어 몰려다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그걸 신념이나 의지의 표현이거나 또는 신념이나 의지의 결핍이라기보다 일종의 버릇이나 기질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요.

(p. 232~237)

 


사적인 연애 감정이 한 시대나 사회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언으로 이 일화는 가치가 있다. (p.238)

 

그는 최 교수의 쾌활한 웃음, 그 웃음이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일종의 건강함과 여유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치욕을 느꼈다. 그 치욕의 내용은 어쩌면 질투였을까? 그는 그 교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왜 그 교수를 싫어했을까?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그 교수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싫어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부러워한다는 뜻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가장 비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사람이 가장 크게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저절로 알게 된다. (p.253)

 

나의 사랑은 그런 식이었다. 사랑은 평화를 향해 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이 감정의 상태에 얽매여선 안 된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 같다. 감정은 평화의 상태를 지향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러나 나의 사랑은 도무지 평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사랑은 너무 아슬아슬하고 가학적이었다. 그랬다. 나는 사랑을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 (<푸른 의자>) (p. 239)

 

사랑도 배워야 하는가. 일찍이 에리히 프롬이 그런 질문을 무색하게 만드는 발언을 했다.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는 한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p. 258)

 

에로스는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먼저 인식한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페는 먼저 사랑한다. 그래서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창조한다.’ … 니그렌은 아가페를 신의 사랑이라고 했다. 조건이 없으며 (조건이 있지 않나.) 자발적인, 아래로 내려오는,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주는, 비동기적이며 넘쳐 흐르는…… 사랑. 그리하여 마침내 아가페는 인간에게 이르는 신의 길이다’ (p. 260)

 

,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런걸 원했겠는가. 원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나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연인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는 내가 필요했다. 그녀는 완전해야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했다. 그런 관념을 통해 나는 만족을 얻었다. 그렇게 밖에 사랑하지 못한, 그것이 나의 불행이었고, 나의 사랑의 예정된 비극이었다. (<사랑의 어려움>..) (p. 261)

 

그는 한강으로 가서 강물을 보고 악을 썼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괴성이 시뻘건 피를 흘리며 강물 속으로 뚝뚝 떨어져 나갔다. 그는 풀밭에 등을 대고 누웠다. 하늘이 까마득히 먼 곳에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보았다. 절망이 잘 익은 밤송이처럼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밀어닥쳤다. 그는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대학은 그 사회의 성감대나 마찬가지였다.

(p.267)

 

그의 삶은 헌신의 대상을 잃음으로써 비스킷처럼 바삭바삭해져 버렸다. (p. 285)

 

이제까지의 실패들을 단숨에 벌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일격, 그것이 그가 은밀하게 노린 확고하고 분명한 표적이 아니었을까. …. 흡사 고백성사에 임하는 듯한 카타르시스의 경험… (p.296)

 

K가 있는 교회는 강원도 강릉에서 속초로 가는 해안 도로의 한 언덕에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p. 298)

 

그가 해낸 것은 아버지와의 값싼 화해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교묘한 것이다. 죄의식의 되돌림. 아버지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고통당하기 시작한다. 고통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 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배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p.299-마지막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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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ngsw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