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봤을 때, "아뇨, 저 여행 싫어해요."라고 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계여행이 흔하고 각종 여행기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사실 밖에 나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하고 집에 있는 게 최고인 방콕 예찬론자들에게도 여행은, 최소한 해외여행은 좋아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고 모험심 넘치는, 쿨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나도 입버릇 처럼 당연히 여행 예찬을 일삼고 다니다가 어느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방구석에서 생각해봤다. 나 진짜 여행 좋아하는 건가? 좋아한다면, 왜 좋아하는 건가.
일단 국어사전에서 '여행'이라는 단어를 찾아봤다. (이런 원초적인 접근이라니!) 나그네 '려'에 다닐 '행'. 나그네가 되어 다닌다는 뜻. 그렇다면 나그네는 무슨 뜻인가 보니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이란다. 단어의 의미를 알고나니 어쩐지 구름모자 쓰고 길 위를 떠도는 나그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쩌다 나는 길 위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을까.
로드무비가 심어준 환상
손바닥 만 한 책상 하나가 생활 반경의 전부였던, 딱딱한 의자에 하루 최소 10시간을 앉아 이해도 되지 않는 수학공식을 꾸역꾸역 머리에 쑤셔넣던 고등학교 시절. 내 인생의 반짝이는 시기를 왜 이렇게 답답하게 보내야 하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하루하루가 지겹고, 외롭지만 친구는 별로 만들고 싶지 않던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영화와 음악 그리고 밤마다 쏟아지는 생각을 쏟아내던 일기장이었다. 거의 하루종일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 않고, 밤마다 깜깜한 기숙사 침대에서 영화를 두 편씩 보던 시절. 그 시절 닥치는대로 봤던 영화들 중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작품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델마와 루이스>, <노킹 온 헤븐스 도어>, <길 위에서>와 같은 로드무비였다. 갇혀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자유를 찾아 떠나는 '길 위의 삶'이라는 이미지가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조금만 견디면 나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에 그 시절을 견뎠다.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모범적'인 삶의 모습이 있고,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낙오자 취급 받는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꼈다. 죽어라 공부 해서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아이 기르다 생을 마감하는 건가? 이렇게 똑같이 살 거면 왜 이렇게 고생해서 공부해야 하는거지? 얼굴 생김새가 다 다르듯 삶의 생김새도 다른 게 정상 아냐? 이런 질문을 던지던 나에게 여행은 익숙한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세상에 너무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줬다. 일 년 중 6개월은 요리하며 돈을 벌고, 나머지 6개월은 번 돈으로 세계를 여행하며 사진을 찍는 이탈리안 셰프, 치앙마이에서 떡볶이 집을 운영하며 주말엔 동남아 각지로 여행 다닌다는 한국인 부부, 3년 째 세계 구석구석을 떠돌며 글 쓰고 다음 영화의 영감을 찾아다니는 뉴질랜드 출신 단편영화 제작자... 떠나지 않았으면 존재하는 지 조차 몰랐을 사람들과의 만남. 삶에 모범답안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원하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살아가면 되는 걸.
그 길로 안 가도 괜찮아
운전면허도 무서워서 아직 엄두를 못내고 있을 정도로 '길치'라는 단어로는 설명하기에 부족한, 정말이지 형편없는 방향감각을 가진 나에게 길을 잃는 건 일상이다. 일상에서 길을 잃으면 그저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이 길어져 답답하고 비효율적일 뿐이지만, 목적지가 없거나 있어도 계속 바뀌는 여행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멋진 순간들이 찾아왔다. 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조금 다른 길로 가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길로 가면 좀 어때. 길 좀 잃으면 어때.
이렇게 말하면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닌 탐험가 같지만 사실 그리 많은 곳을 여행한 건 아니다. 그저 시간과 금전상황이 허락할 때 (때로는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 해) 고민하며 비행기표를 끊었고, 딱 고만큼 떠날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렇게 떠났던 몇 차례의 여행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가끔 떠오르는, 반짝이는 순간들을 선사해 주었다.
- 음악에 취해있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는데 별들이 쏟아질 것 같던 빠이의 레게 페스티벌
- 길에서 평소 좋아하던 유투버를 보고 무작정 쫒아 들어가 말 걸었던 LA의 스타벅스
- 쇼팽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벤치에서 쇼팽 얼굴이 새겨진 보드카를 홀짝였던 바르샤바의 오후
두고두고 담아뒀다 가끔씩 꺼내어 볼, 나만이 기억할 순간들.
Life is a guesthouse
그동안의 여행에서 고수했던 스타일 중 하나는 웬만하면 호텔보다는 게스트하우스나 카우치서핑 등을 이용해 현지인 또는 다른 여행자들과 만날 수 있는 곳에 묵는 것이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 외에도 요즘은 1, 2인실 등이 잘 구비된 곳이 많아 분리된 공간에 묵으면서도 공용 공간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언제나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궁금했고, 그러다보니 다양한 도시에서 다양한 게스트하우스에 묵게 되었고, 너무도 가지각색인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에 푹 빠졌다. 교토의 고즈넉한 게스트하우스와 루앙프라방의 침대는 돌 같았지만 주인의 마음씨가 솜털 같았던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제주도의 푸른바다가 보이는 게스트하우스는 디자인도 분위기도 심지어 묵는 사람들의 느낌도 너무 달랐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게스트하우스는 그곳의 주인과 똑 닮는다는 것이다. 드레드락을 한 주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선 어김없이 레게음악이 흘러나왔고, 만화 캐릭터를 닮은 주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의 책장엔 만화책이 가득했다. 이렇게 게스트하우스는 사람을 닮았지만, 어떤 면에선 삶도 닮았다는 생각이 여행을 할 때마다 든다. 멕시코시티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늦잠으로 인해 다음 행선지로 가는 버스를 놓쳐 시간이 붕 떴을 때 썼던 글을 (나의 스페인어 못함에 대한 한탄 부분은 제외하고) 옮겨본다.
* 여행의 매력: 나는 왜 여행하는가
우연히 가 닿은 곳에서 우연히 만나는 매력적인 사람과의 인연. 우연과 불확실성이 이끄는 만남에 끌린다. 낯선 풍경의 매력. 예측 가능한 삶은 지루하다. 끊임없이 경계를 무너뜨리고 넓히고 확장하는 삶. 여행을 다니면서, 지금 나는 지구(세계지도)의 어디쯤에 있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Couchsurfing은 여행자에게 있어 정말 획기적인 서비스다. 게스트하우스도 그렇고. 게스트하우스라는 컨셉, 너무 매력적이다. 어찌 보면 우리 삶도 하나의 게스트하우스가 아닌가.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고 가는 중에 누군가는 하루 만에 떠나가기도 하고 그 중 몇몇은 조금 더 오래 머물기도 한다. 터미널과는 다르다. 터미널을 찾는 사람들은 무조건 떠나는 사람들이지만, 게스트하우스는 장기 투숙자도 있다는 점에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내가 묵었던 도시들의 다양한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
이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
여행이 갖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빡빡한 일상으로부터의 휴식,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 익숙함으로부터의 도피, 또는 그냥 갈 수 있으니까... 나에게 여행은 '이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어딘가를 꼭 가고싶었다기 보다는, 지금 이곳에서 떠나고 싶어 선택한 여행인 경우가 많았달까. 그야말로 방황을 위한 방황으로써의 여행.
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
방황도 체질이라 한다. 가족을 포함 내 방황의 역사를 아는 지인들은 십대부터 쭈욱 일관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도 드물다며, 이제 좀 정착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한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나의 이런 성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문구를, 반 쯤 읽다가 내던지고 아직 줍지 않은 책 <파우스트>에서 찾아내고야 말았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는 괴테의 말. 삶에 있어서의 방황은 생의 다채로움이자 참된 자아를 찾는 지름길이며,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으려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말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나는 노력하고 있으니까 방황하는 거라고. 언제 정착하고 싶어질 지는 모르지만, 그 때까진 맘껏 방황하려 한다.
그리하여 한 주 뒤면 나는 또 다시 짐을 싸서 떠난다. 이번엔 또 어떤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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