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2018. 4. 23. 00:51

 


영덕(영화덕후)질의 최고봉 중 하나는 영화에 나온 장소를 직접 가보는 것이라 했던가. 어떤 영화를 보고 받은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나도 그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훌쩍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경험. 내게도 그런 적이 딱 세 번 있다. <인도차이나> 보고 갔던 베트남 하롱베이, <라라랜드> 보고 떠났던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화양연화> 보고 찾았던 씨엠립의 앙코르와트. 그 중 앙코르와트는 순전히 양조위가 비밀을 속삭였던 그 곳에서 나도 내 비밀을 속삭이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캄보디아 국경을 넘게 했으니. (물론 양조위의 미모도 한 몫 했음을 거부할 수 없다) 막상 찾은 앙코르와트엔 영화에서 본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이 존재했다. 학교에 가 있어야 할 대여섯살 아이들이 "마담, 원딸라"를 외치며 생계를 위해 사진엽서 뭉치를 파는 모습을 보고 한낱 감상에 빠져 찾은 내가 살짝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래도 가끔은 대책 없이 감상에 젖는 인간인지라 'Quizas, quizas, quizas'를 귀에 꽂고 관광객스러운 사진 한 장 안 남길 수 없었지만.


왕가위 감독을 이야기하면서 홍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타락천사>로 이어지던 나의 왕가위 편애는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에서 정점을 찍고 나에게 스스로 '왕가위 팬'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했다. 그의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배경인, 동서양이 혼재된 세기말 홍콩의 분위기는 내게 겪어보지도 않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으로 나오는 디스토피안적 미래도시의 홍콩스러운 분위기도 그래서 너무나 좋아한다. 물론 밤이어야 하고, 비도 내려야 한다. 모퉁이마다 도시의 우울과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먹고사니즘의 고단함과 왠지 모를 향수가 뒤엉켜 있는, 비오는 홍콩의 밤거리-오랫동안 그리워해 온 풍경. 언제 또 왕가위 영화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홍콩행 비행기표를 끊어버릴 지 모른다. 가서 상상과는 다른 풍경을 마주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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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ngsw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