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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듣고느끼고2013. 2. 2. 02:52

2013년 2월 1일. 드디어 이 책을 만나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야생, 원시, 생명력, 소리꾼 

활자의 숲 : 책에 대한 예찬 

그녀에게서는 바람 향기가 난다. 


아름답고 창조적인 삶. 

이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단언한다. 생명력을 잃지 말 것. 

허무하다느니, 삶의 목적을 모르겠다느니 하는 배부른 소리는 하지도 말 것.

인생은 아름답다. 찬란하게 아름다운 매 순간을 충실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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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한 국경을 벗어나는 일은 오랜 관성에 찬물을 확 끼얹고, 세상을 인지하는 새로운 감각을 획득하는 일인 동시에, 내 몸과 의식이 담긴 세상을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그 자체로 우리의 인생에 강렬한 계시를 남기는 것임을 알게 한다. 

국경이라는 철조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는 전지구적 틀이다. 

...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타고난 야성을 길들이려는 부모와 이웃, 그리고 학교의 거대한 훈육의 틀 안에서 자유의지를 조종당한다. 아이의 야성이 지속적인 훈육 밑에서 조금씩 힘을 읽고,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고, 그 후엔 거리의 무수한 광고메시지가 주입하는 대로 "부자"가 되어 더 많이 "소비"하는 착한 자본주의자가 되는 일에 긴 줄을 설 때, 우린 비로소 "이제 철이 들었다."는 덕담을 듣는다. (p.5) 


남은 일은 얼굴에 주름을 속절없이 그려가고, 지나다니는 멋진 인간들은 모두 그림의 떡이며, 그 이전까지 죽을 힘을 다해 쌓아놓은 인생의 밑천ㅡ학력, 직업, 배우자 따위ㅡ들을 틀로 삼아 그 속에 꾸역꾸역 벽돌을 쌓아올리는 일, 그 정도가 서른 후의 인생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살아가기보다 살아지는 것에 가까운 그 날들을 도대체 사람들은 무슨 마음으로 어떤 설렘도 없이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섣부른 저주를 퍼붓곤 했다. 


내 나이 60에 그녀와 같은 느낌의 얼굴을 갖자! 여전히 떨리는 소녀의 감성을 담은 그녀의 표정, 그 얼굴을 다소곳이 감싸 안은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 조용히 혁명을 실천할 용기를 가진 단호한 눈빛, 뽀얀 섬광이 내면에서 비춰오는 듯한 맑은 피부, 무엇보다도 그 어떤 고정관념에도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은 날선 자아를 가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 서른 이후에도, 서른까지의 삶을 한 번 더 반복한 후에도, 아름답고 창조적인 삶은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문제는 내가 내 삶에서 어떻게 제대로 주인 노릇을 하느냐에 달린 것. 내 안에서 환한 섬광을 이끌어낼 만큼 가슴 뿌듯한 기쁨을 주는 일과 사람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는 일이 남아있을 뿐이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삶

... 나는 젊게 사는 방법을 안다. 그건 오래도록 철들지 않으면 된다. 그럼 남들한테 철들라고 잔소리 할 일도 없고, 도리어 세살 짜리 아이한테서도 종종 잔소리를 듣는 호사를 누리며 살 수 있다. 영원히 젊게. (p.9) 


...더 깊숙한 계곡을 찾아 껑충 뛰어넘고 싶은 욕망은, 될 수 있는 한, 먼나라, 다른 사회에 가서 그 깊은 계곡에 고인 '다름'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꿈으로 발전했다. 


"넌 이제 자유다"

나의 염원은 이십대가 끝나는 해에 실현되었다. 늘 저 먼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자기 암시를 해왔지만, 떠나기 가장 좋은 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꺼번에 내 인생에 들이닥쳤다. 


살면서 가끔 그렇게 백지를 만들 때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그래야 관성을 벗고 새롭게 본능과 만날 수 있다. 그때 우주는 무수한 신호를 내게 보낸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새로운 교신을 보내고, 가는 곳마다 영감을 얻는다. 에덴동산에 막 떨어진 이브가 된 느낌... 


손에 가득 쥐고 있는 한, 결코 새로운 것을 손에 쥘 수 없는 법이다. 


여행자로 백날 먼 나라를 가봐야 여행자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라고, 직접 다른 나라에 발을 딛고, 거기 사람들과 소통하고 생활하며 지내야 비로소 네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충동질했다. 


...희완과 나의 대화는 문화, 예술, 정치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가열되고 때론 폭발한다.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는 대체로 의미심장하고 진지한 것들이었으나, 가장 강한 잔상은 대화 내내 그가 자주 보여주었던 '냉소로 쪼개지지 않는 1백%의 웃음'이었다.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85% 만큼만 웃었다. 모든 상황에서 15% 정도의 판단은 유보해 놓으려는 실존적 고집이었다. 혹시라도 파안대소를 하게 되면 바로 입 꼬리를 조금 일그러뜨려 표정을 수습하는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언제나 날선 비판력만이 자아를 지켜준다고 믿는 이 나라 사람들의 '겉멋'인 듯하다. 일곱 살만 되면 아이들도 15%의 냉소를 머금은 예의 그 프랑스적인 웃음을 입가에 달고 있다. 그렇기에 내 면밀한 관찰의 결과에 예외로 기록될 이 100%의 웃음의 주인공은 단박에 나의 각별한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사랑이 시작될 때 얼마나 많은 우연의 새가 어깨 위에 날아와 앉는지에 따라서 앞으로 펼쳐질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썼다. (p.30) 

2차대전 후 그는 대학생, 노동자, 바의 피아니스트(그의 아버지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를 거쳐 문학과 영화에 몰두했다. => 밀란 쿤데라의 소개 중 위로가 되는 부분. 


그동안 거침없이 성장한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와 문화산업 탓에 산산이 부서진 인류의 그 광휘로운 보물인 '문화 다양성'이 그의 음반꽂이 속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21살에 처음으로 티베트 음악을 듣게 된 그는 그저 배경음악용으로 틀어두는 게 아니라 음악 속으로 깊게 발을 딛고 들어가야 만나지는 저 거칠고 광활한 세계가 있음을 발결했다. 그것은 바로 산업화의 잔인한 메스를 거치지 않은 세상의 모든 음악이었다. 

... 결핍과 풍요가 품목별로 극단적 대비를 이루는 그의 집은 그가 택한 극명한 선택만큼이나 그를 둘러싼 사람들 역시 그를 열광적으로 좋아하거나 완전히 외면하게 되는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요구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p.37)


희완에게는 자신만의 성이 있다. 내가 늘 가지고 싶어 했던 그것. 세상의 논리를 시선 하나로 간단히 유린하고, 경쟁의 뜀박질 속에서 슬쩍 비껴나 울울창창한 숲 속에서 자신의 열매를 가꾸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그런 성이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하실이라고 표현하고, 자크 뒤아멜은 '자신만의 소우주'라고 표현한다.

-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떠오른다. 


..그는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는 자기만의 원칙 속에서 게임을 즐기는 것에서 재미를 찾았다. 나는 말을 잡아먹는 재미도 제대로 모르는 희완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긴 전투가 끝났을 때 희완이 고수하는 삶의 원칙이 이 사소한 놀이에도 변함없이 관철돼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경쟁하는게 아니라 공존하는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이었다. 

=> 경쟁이 전혀 없는 시스템에도 병폐가 있다. 건강하게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경쟁의 정도는 어떻게 판가름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삶에서, 사회에서 필요한 경쟁의 부문에는 어느 것이 있을까? 


떠나는 당신에게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프랑스를 택한 뒤, 떠나기 전에 몇몇 지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닐 무렵이었다. 누군가 파리생활 7년차인 유학생이 잠시 한국에 와 있으니 한번 만나 조언을 듣고 가라고 말해줬다. 그 7년차 유학생은 제일 먼저 파리에 있는 한인교회에 다니라고 조언했다. 거기 가면 오빠들이 많이 도와줄 거라나. 여자니까 집은 꼭 중앙난방이 되는지 확인하고 파리 남쪽에 얻으라고 했다. 어쨌든 북쪽 동네는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트북도 새 것으로 사가라고 했다. 유학의 성패는 애초에 가진 돈이 좀 있느냐가 좌우한다고도 했다. 그 남자가 입을 연 순간부터 그가 한 얘기를 잘 새겨들었다가 정반대로 실행해야겠다고 다짐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지금 누군가 내게 조언을 구한다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난 경쟁을 딛고 더 높은 곳에 올라서려는 마음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긴 소풍을 베푼다는 마음으로, 여정 자체를 즐기는 먼 길을 떠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투자할 시간, 투자할 돈, 그렇게 해서 딴 학위가 나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더 분명하고 안전한 선택을 매순간 계산해야 한다면, 한 순간도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불만은 터뜨리고 욕망은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그러나 내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한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모두가 욕망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해진 일반적 욕망의 리스트일 뿐인지를 가늠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태어나서 20년 가까이는 갈까 말까, 간다면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보다는 그저 묵묵히 앞으로 가야 하는 길만이 주어진다. 그렇게 아무런 반항도 없이 얌전하게 길을 통과하면 대학이라는 문으로 이어지고, 그때 비로소 약간의 자유가 툭 떨어진다. 우리 발 앞에 떨어진 이 황당한 존재, 자유란 놈은 진정한 내면의 자아와 세상이 우리에게 주입해 왔던 가치가 충돌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방황과 고뇌'라 부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황홀한 자아의 꿈틀거림은 4년 정도에서 멈추고 만다. 남자들의 경우는 군대라는 아주 효과적인 도구를 통해, 대학문을 나서기도 전에 이미 넥타이와 양복 속에 갇힌 텅 빈 눈빛의 인간으로 서둘러 탈바꿈한다. 

그나마 대학 4년의 시간을 자아의 공식적인 요동기로 명명하는 것도 90년대 학번까지만 해당되는 게 아닌가 싶다. 기업과의 밀착된 관계를 노골적으로 자랑하는 지금의 대학, 1천만 원에 육박하는 일년치 등록금이 쳐 놓은 바리케이트 속에서 21세기의 기업들이 원하는 반듯한 깍두기들을 또깍또깍 썰어내는 곳이 요즘의 대학일진대, 그 안에서 범람하는 지성과 지랄하는 야성, 광기어린 영혼 따위가 요동치기를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인 것 같다. 

한국에서 자신의 발 앞에 놓인 선택의 틀에 괴로워하는 여성들을 볼 때마다, 난 그녀들에게 다른 나라로 떠나라고 충동질했다. 프랑스에서 정해진 안온한 삶에 몸이 근질거려 하면서도 모험심 없이 눈만 뻐끔거리며 그럭저럭 지내는 프랑스 남자들을 보면서, 한국이나 일본으로 가라고 충동질했던 것처럼. 그렇게 해서 잠시 다른 질서 속에 방황하는 것, 자유 속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들을 고르는 경험을 하는 것, 적어도 오늘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요구가 내가 살아내야 하고 견뎌내야 할 유일한 조건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 살면서 꼭 해보아야 할 경험들이 아닐까. 


프랑스 고3의 여름방학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손에 잡힐 듯 보일 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여전히 진화하지 못한 장래희망의 목록을 들고 서서 황망해 하고 절망하며 몸부림치던 나의 대학교 4학년이 떠오른다. 나름대로 자유롭게 나를 풀어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이제 대학이란 작은 연못을 떠나 내가 항해하고 싶은 대양을 선택할 때에 이르러 즐거이 달음질 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부끄러움, 그 고통으로 1년 내내 앓으면서 5kg의 살을 태워버렸다. 결국 나는 진정으로 선택하기 위해 나에게 4년이라는 시간의 유예를 주기로 한다. 그게 관광공사 4년의 시간이었다. 적어도 내 전공인 러시아어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과 공기업인 탓에 공공의 이익을 봉사하며 고민할 수 있겠다는 점 등을 위안삼아. 

거기가 나의 종착점일 수 없음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내 안의 욕망을 탐문하는 실험의 시기를 가졌다.

... (p.102) 


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한 영역씩 맡아서 한우물을 죽어라 파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어쩌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 수도 있다. 난 이 거대한 사회의 나사가 아니다. 나 혼자서도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구성할 수 있다. 여러 우물을 파면서, 세상의 모든 재미를 두루 즐기면서. (p.163) 


공간은 사람을 지배한다. 


갸를롱은 거대하고 진지한, 그러나 영감에 가득 찬 '어른들의 놀이'였다. 그것은 모든 예술의 본질이고, 호모루덴스의 실체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 어릴 적에 그렇게 놀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지고 진지하게 가상의 세계를 꾸며내 하루 종일 놀 줄 알았다. (p.182) 


그냥 내버려 두면 갸를롱 스스로 무언가 될 거야.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속담이 지배하는 사회. 

건강한 개인주의. 


압축성장한 한국 사회의 사람들이 재깍재깍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후딱후딱 불필요한 과정을 제거하는데 능한 반면, 오랫동안 지구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어왔던 제국주의 국가의 후예들은 성급히 스스로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기보다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려는 습관이 있다. (p.204)


희완은 웃을 때 100%로 웃는 것처럼 사랑을 할 때도 마음 밑바닥까지 다 바쳐 사랑한다. 그는 아침에 헤어질 때면 늘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저녁에 만날 때면 10년 만에 재회한 것처럼 뜨겁게 포옹하는 남자다. 


당신의 취향은 정말 당신 것인가 (p.209) 

일찍이 부르디외가 명쾌하게 일갈한 바 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향이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출신계급과 교육수준, 집안 환경 등이 촘촘히 얽혀서 구조적으로 생산되고 또 확산된다. 

... 

가장 비싼 핸드백을 일률적으로 들고 다닌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의 자유를 저버린다는 의미다. 경제적 풍요가 도리어 최고급 메이커 제품에만 한정된 선택을 하도록 하는 족쇄가 되는 셈이다. 요동하는 시대는 거치면서 부자들은 모두 신흥부자들일수 밖에 없게 된, 이 사회에서 독자적인 미감과 취향을 연마한 세대적 연륜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들에게는 이른바 명품 취향이 다른 계층과 서둘러 경계를 긋고자 할 때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된다. 

공부를 잘하면 선택할 수 있는 학과와 대학의 선택의 폭이 넓어져야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한국사회는 예외의 답을 제공한다. 한국 사회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의미는 조변석개하는 입시제도에 발 빠르게 대응할 만큼 기동력을 갖춘 학원 강사들에게서 정답 고르는 요령을 잘 배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진정한 지성과 명민함이나 세상을 통찰하는 독자적 시각을 갖추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대의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거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적인 지향과 욕망에 충실한 선택으로서의 좌파, 자유롭고 당당한 생활좌파가 많을수록 미래가 밝다는 게 내 생각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의 깃발을 높이 올리는 모습만이 좌파의 전부는 아니며, 그런 자세가 좌파의 승리를 앞당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p.213)


선택의 기준이 늘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진 한국사회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나의 무뎌진 감각과 취향을 숨쉬게 하는 것은 엄청난 노력과 의지를 동원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좌든 우든 진정한 나의 지향을 발견하기에 앞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며, 단순히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나야할 관문이다. (p.222)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에는 어떤 국경도 경계도 없다.

초록별 지구는 땅덩어리뿐 아니라 하늘도 바다에도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어 허락 없이 그 선을 넘으면 범죄자가 되게 한다. 그뿐 아니라 사람 사는 방법에서도, 합리적인 어휘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관습의 억압이 우리의 영혼을 죽음 속에 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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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디 좁은 잣대가 가두어 놓은 '정상'과 '합법'의 틀을 표면적으로나마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다 거기서 밀려나면 좌절하고 소외되는 어리석음이 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한국사회엔 지천으로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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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려운 것이 없다.

고 말하고 나면 두려운 것이 없어진다.

우리가 갖는 두려움의 실체는 결국은 타인의 판단과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든 판단과 평가가 내 안에만 있아면, 두려움 따윈 정복하고 살 수 있다. 


난 오늘을 희생하며 내일을 기약하자는 그 어떤 설교도 믿지 않는다.

천국을 팔고 예수를 팔아 배타적인 좁은 길 속에 사람을 가두는 기독교, 통일을 팔아 인민에게 희생을 헌납받고 배고픈 오늘을 돌려주는 북한 정권, 민중을 팔아 개인적 욕구를 폄하하고 집단주의에 사람들을 복속시키는 자가당착의 낡은 정치집단을 믿지 않는다. 물론 머슴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겠다는 그 많은 사람들도,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가 되어야 복지를 할 수 있다는 그 속보이는 분들도. 

오늘이 행복하면, 내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오늘 나의 삶의 태도가 진실하다면, 내일의 나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있다. 


밖을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오면, 내 이마에 태양의 향기가 진동한다며 그 향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희완은 이제 칼리의 곱슬거리는 머리 위에 내려앉은 태향의 향기를 맡으며 같은 표정을 짓는다. 나도 같이 희완이 말하는 그 태양의 향기를 칼리의 구불거리는 머리 위에서 맡는다. 희완과 내가 열렬히 숭배하는 칼리, 그리고 그 사랑과 숭배로 단단히 연대하고 있는 희완이란 인생의 동지와 함께 그려내는 이등변 삼각형의 균형을 요리조리 맞춰가며, 지구라는 이 넓은 별에서 쉼없이 경계를 지우며 살아갈 터이다. 


한 우물을 파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그리하여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전 인류가 주입시켜온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나의 욕구와 관심은 나와 함께 진화할 것이며, 열심히 그 새로운 호기심과 열정에 화답하며 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진실이다. 

그래봤자 1세기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내게 주어져 있을 뿐이고 나의 관심사는 '문화'라는 거대한 대지 속에서 이리 저리 출렁거릴 뿐이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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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ngsw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