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듣고느끼고2011. 8. 7. 10:31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고 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그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인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 자신이 꾸며낸 말이지요.
  프랑스말의 '앵프라(infra)'는 영어의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라고 할 때의 '인프라(infra)'와 같은 말로 '기반'이나 '하부'를 뜻하는 접두어입니다. 그리고 '맹스(mince)'는 '얇은 것, 마른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적외선을 '앵프라루즈'라고 하듯이 앵프라맹스라고 하면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초박형의 상태'를 뜻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뒤샹 자신은 그 말을 실사가 아니라 형용사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구체적인 상태라고 하기보다는 작용이나 효과를 나타내는 말로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섬세한 어떤 작용을 뜻하는 암호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비로드 천이 서로 스칠 때 나는 미묘한 소리 같은 것을 그는 앵프라맹스라고 불렀습니다. 시인 김광균의 <설야>에서 '먼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와 같은 것이 한국적인 앵프라맹스의 정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뒤샹은 그의 노트에서 앵프라맹스를 설명하지 않고 64가지의 시적 이미를 통해서 그 개념을 암시하려고 했습니다. 그 중 알기 쉬운 몇가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비로드의 바지ㅡ(걷고 있을 때)바지 가랑이가 스치면서 나는 휘파람 같은 소리는 소리에 의해 표현되는 앵프라맹스의 분리이다. (청각적)
- 담배연기가 그것을 내뿜은 입과 똑같은 냄새를 지닐 때 두 냄새는 앵프라맹스에 의해서 맺어진다. (후각적)
- (사람이 막 일어선)의자에 앉을 때의 미지근한 체온이 깔려있는 것은 앵프라맹스이다.
- 앵프라맹스의 애무.(촉각적)

  사람들은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합니다. 나는 타자와 늘 하나가 되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고 끌어안습니다. 그럴수록 어쩔 수 없이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틈새를 발견하고 안타까워하지요. 애타는 절망이 또다시 남에게 다가서려는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부르고 정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움이라고도 합니다. 보이고 잡히는데도 아주 얇은 앵프라맹스가 그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찢을 수도 녹일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외로움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20대부터 돈이나 가난, 또는 권력, 전쟁에서 비롯된 소유의 결핍보다도 생명의 결핍, 존재의 결여에 대한 그 틈을 메우기 위해서 글을 썼던 것이지요.
...
  이마를 짚는 손. 인간은 절대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찢거나 넘어설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틈을 없앨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초월의 힘이요 영성의 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 이어령, <지성에서 영성으로> p.157-162
20. 이마를 짚는 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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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ngsw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