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듣고느끼고2011. 8. 26. 13:41

이 글을 읽게 된 경로는 다음과 같다.
인물 키워드로 나열해보자면 전혜린-헤르만 헤세-프란츠 카프카-김경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하면
- 간만에 전혜린 책을 읽다가 헤르만 헤세가 나오는 부분을 보고 네이버 캐스트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검색

덕분에 좋은 북리뷰 블로그들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이런 연상효과 면에 있어서는 인터넷이 참 유용하다.  



예전에 가끔씩 패션 잡지를 봤다. 좋아했던 패션지는 BAZZAR와 W. 가끔씩 야한 설문조사나 기사가 있을 경우에 한해 코스모폴리탄을 보기도 했다. 물론 대개의 경우 코스모폴리탄의 글 수준은 저렴해서 타이틀에 뜬 혹하는 문구에 속은 내가 한심했지만.

 패션지를 보다 디자인이나 그림 등을 오려서 방에 붙였고, 트로피컬한 색채의 옷은 따로 스크랩을 해뒀다. 패션지가 갖는 소기의 목적인 아이템을 유행시키거나 좀 더 아름답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는건 내게 해당되지 않았다. 내 경우엔 뷰티나 패션 쪽이 딴나라 얘기 같아서 주로 피처 기사만 봤기 때문이다.(도대체 한 시간 정도 공을 들여 하는 화장은 어떤건지 상상할 수가 없고, 옷을 살때면 돈 주고 샀다고 하면 창피할만한 것들만 구매하는 편이라.) 특히 인터뷰 기사나 책, 음반, 영화 소식도 좋았지만 에디터들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기사를 더 좋아했다. 지금은 예전만큼 글 잘 쓰는 에디터가 없고, 거대한 패션지가 불러일으키는 종이 낭비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아니아니 실은 만병의 근원 게으름이 도져서 잡지를 잘 보지 않는다. 그 당시 이름만으로 글을 보기 시작했던 사람 중에 한명이 바로 피처 에디터인 김경이었다.

 나는 글에서 글 쓴 사람이 엿보이는걸 좋아한다. 객관적인 거리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나처럼 구구절절 늘어놓는 신상명세 보고서 같은게 아니라 글 안에서 반짝거리는 자신만의 생각이나 삶, 아픔의 흔적, 또렷한 개인적인 시선이 묻어나오길 바란다. 그렇다면 왠지 섬처럼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를 얄팍하지만 튼튼한 다리로 연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글은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신상 정보를 죄다 쏟아부으라는게 아니다. 케이블 텔레비전에선 연일 실명으로 애인을 뒤쫓고, 연인끼리 싸우고 얼짱이라면서 떠들어대고 있는데 굳이 책까지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 알량한 신상따위는 가볍게 팔아버리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만 동동, 그런데 아무도 알고 싶지 않은 '그런 자기 이야기' 말고, 주제와 관련있는 자기 이야기를 제법 멋들어지게 가공할줄 아는데다 그 안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대한 고민이 담겨진 글까지 쓸 수 있는 사람이 쓴 글이 좋다. 그래서 김경의 글이 좋았다. 매달 소모되는 운명을 지닌 기사의 작은 일부라도 말이다.

 한겨레 신문에 '스타일 앤 더 시티'란 타이틀로 스타일에 대한 칼럼을 쓴 김경. 그녀가 그동안 쓴 칼럼을 책으로 냈었다. 알차고 야무지다. 김경은 '자기 주제'를 정확히 아는지라 자신이 보여줄 수 있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잘 안다. 오버하지 않는다는거다. 설레발치며 이것도 저것도 다 끌어들이지 않는다. 자신이 잘 알고, 자신있는 것만 얘기한다. 고군분투기를 얘기하거나 일반의 정서에 호소하진 않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에는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여러 지층이 꽤 탄탄해지고 매혹적으로 변모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김경과 나는 여러모로 닮아있다.(저자와 나를 동일시하여 별거 없는 날 좀 더 괜찮게 보이고자 하는 의도? 맞다.) 우린 개혁당의 당원이었지만, 유시민이 개혁당을 열린 우리당으로 헌납하듯 가져갈 때 이름 바뀐 당에 들어가지 않았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과, 누군가의 '스타일'에 혹하고 열광하는 족속이라는 것. 누군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보다는 어떤 태도를 지니고, 어떻게 삶을 바라보는지를 더 좋아한다는 것. 나 좋으라고 하는 기부로 생색을 낸다는 것, 노브라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는 것,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토록 사소한 것에 우주를 담아내는 것이란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이 책을 보면서 맞아요, 맞아. 나도 그렇다고 하면서 전적으로 동감을 표했던 부분들은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의 글을 읽은 후로 난 몇가지 것들에 더 집착하게 됐다. 다다이스트 뒤샹의 '존재의 품격은 적당한 외면에서 나온다'란 짧은 명구랄지, 제인 버킨의 에티튜드나 스타일에 대한 생각, 누군가를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의 방에 들어가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방 이론’.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낸시 랭을 다시 봤고, 아토 마우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꽃다발은 어떻게 선물해야 가장 멋진지, 아라키라는 뼛속까지 사진작가인 사람, 양복을 센스있게 입는 방법, 플라멩코의 매력과 단 몇분의 오르가즘처럼 느껴지는 살사 추는 순간의 기록까지.

 알라디너들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품절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인터넷이 있고, 한겨레21이 있다. 매혹적인 단독자들을 인터뷰한 김경의 다른 책 '싸이는 싸이이고, 김훈은 김훈이다'도 있다. 

http://h21.hani.co.kr/arti/COLUMN/53/?ing=n&sid=5&cline=90

  나는 그녀가 스페인에서 돌아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시 한번 있는 힘껏 손을 뻗으면 아마도 그녀의 손을 꼭 잡을 수 있겠지. 그때까지 안녕. 아름다운 글쟁, 아니 잡문쟁이, 김경!

  미셸 투르니에, [흡혈귀의 비상] 중에서 (전에 썼던 페이퍼에 있던 구절. 몸으로 하는 공부의 서문에 씌어 있었다.)

'잡문'이라는 단어는 논쟁들, 지엽말단의 문학, 지나친 자유, 언어의 가치 하락에서 유래하는 폭력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총체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의 인격이 자신을 드러내고 활짝 피어나는 것은 오직 비정상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그 사회와의 대립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잡문의 시기에는 천재성과 범죄성 사이에 불가피한 친화력이 있다.

출처: http://blog.aladin.co.kr/numinose/312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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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ngsw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