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사회자’,‘소수자의 마이크’,‘시사평론가’ 최광기(39)를 수식하는 직함들이다. 그러나 그는 명함이 없다. 자신을 소개할 때는 “광기(狂氣) 있는 여자”라고 말하며 웃는다. 호탕한 웃음에는 빛이 어렸고,
목소리는 ‘의외로’ 고왔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글에는 ‘(웃음)’이 유난히 많다.
여러분, 최광기씨를 소개합니다지난 2004년 3월,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짱짱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무효 촛불집회’ 현장이었다. 아득히 먼 무대에서 최광기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10만 시민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주로 소수자, 약자의 편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그러나 그날 10만 개의 촛불 앞에서 ‘개새끼들’을 외치는 목소리는 약하지 않았다. 마음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저를 기억하죠. 현장에서 저를 본 사람들은 강한 어조를 기억해요. 선동적이죠. 어떤 젊은 사람은 ‘그때
파티에서 봤는데 무척 재밌었다’며 저를 ‘파뤼녀’로 알아보던데요, 요즘은 파티를 많이 하니까(웃음).”
만삭의 몸으로 구급차를 대기시켜놓고 집회를 진행하기도 하고, 무대에서 실족해 팔이 부러졌지만 응급조치만 마친 채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행사를 마친 뒤에는 두 차례나 응급수술을 받았다.
2004년의 촛불 집회가 그를 ‘스타’로 만들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마이크를 잡아왔다.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 ‘월경 페스티벌’, ‘빅 우먼 패션쇼’, ‘대한민국 여성축제’ 등 여성계를 대표하는 여성 전문 사회자로 ‘미래의 여성지도자상’을 수상했다. ‘틱낫한 스님 초청 민족평화대회’, ‘인권콘서트’, ‘노래판굿 꽃다지’ 등 장애, 인권 사회자로서 1천여 개 크고 작은 행사를 진행했다. 지난 2006년에는 책을 썼다. 「밥이 되는 말, 희망이 되는 말」은 거리에서 보낸 10년 동안의 이야기고, ‘사람을 움직이는 말하기’를 가르친다.
“요즘은 강의가 참 많아요. 10대부터 나이 드신 분들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죠. 그리고 매주 일요일에는 방송을 하고(최광기, 황현희의 시사난타. EBS FM), 방송과 강의가 요즘의 일상이에요.”
다양한 방송 출연은 그에게도 계기가 됐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을 아껴야 한다.
“지금은 여성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어요. 탈 성매매 자립센터에 가서 일도 하고, 청소년들도 만나고. 더 가깝게 호흡할 수 있는 무대에 많이 서고 있죠.”
지난 12월 15일에는
보호감찰을 받는 10대를 상대로 강의에 나섰다. 담당자는 겁부터 줬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요. 어려우시더라도 마음을 비우고 하세요’라는 말에 고민이 앞섰다. 그러나 그가 만난 아이들은 예상과 달랐다. ‘보호감찰’은 편견이었다. 강의를 마치자 한 아이는 쪽지에 마음을 전해왔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라는 수줍은 세 마디가 적혀 있었어요. 아이들은 마음이 고와요.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죠. 부모의 책임일 수도 있고, 사회의 책임일 수도 있어요.”
아이들에게는 “너희들이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하루에 한 번씩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전하기로 약속하자”고 말했다. 녹내장 말기인 그의 오른쪽 눈은 실명 상태, 왼쪽도 ‘진행 중’이다. 무대에서 실족했던 것도 한쪽 눈만으로는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3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죠.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같이 있는 것을 고마워해야 해요. 우리 와인 한 잔 할까요?”
자, 이제 세 권의 노트를 준비하세요최광기는 주로 ‘긍정의 힘’에 대해 강의한다. 오늘은 그 일부를 공개한다. 나를 다스리는 여느 방법과 마찬가지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와인 한 병을 비워가며 나눈
인터뷰는 기분 좋게 취했지만, 무게는 잃지 않았다. 키워드는 ‘노트’와 ‘쓰기’다.
“자신에 대한 공책을 마련하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했어요. 첫 번째 공책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공책이죠. 나의 장점이나 하고 싶은 것을 쓰는 공책입니다. 단, 반드시 구체적으로 써야 해요.”
‘겸손’이 미덕인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미덕을 예민하게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말로 하기는 더 어렵다. 강의에서 만난 사람들은 ‘장점을 말해보라’는 질문에 주로 급훈을 왼다. “전…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아무 소용없다. 이것이 공책을 준비하는 이유다. 아무도 안 보는 일기장에 자신에 대해 쓴다고 생각한다.
“전 얼굴이 커서 너무 좋아요. 제가 김태희처럼 얼굴이 조막만 해봐요. 무대에서 보이지도 않았을걸요(웃음). 그리고 전 밥을 잘해요. 밥만 잘해서 문제지만. 우리 엄마 밥을 40년을 먹던 아버지도, ‘밥은 네가 낫다’고 인정했어요. 이렇게 자신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죠.”
최광기처럼 ‘뻔뻔’해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공책에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두 번째 공책은 ‘해소장’이다. 주로 욕을 쓴다.
“긍정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를 잘 다스리는 것도 중요해요. 역시 쓰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어요. 남편 욕도 쓰고,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쓰죠. 그러고 나면 ‘별거 아닌 일에 왜 그랬지?’ 하고 유치해지기도 하고, 더러는 ‘이놈은 끝까지 나쁜 놈이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하죠. 그럴 땐 ‘넌 정리대상이다!’라고 외치세요(웃음).”
세 번째는 ‘꿈의 노트’다. 크고 작은 인생의 목표를 끊임없이 만든다. 작은 목표는 삶의 동기부여고, 활력이다. 책을 내겠다, 진행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최광기의 목표 중 하나였다.
“예전에 어머니학교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어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 ‘서른이 되면 여자들에 대한 얘기를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못 배우고, 가난하고, 극복하지 못해서 여전히 어렵지만 억척스럽게 사는 어머니들 이야기. 힘들지만 따뜻하게 사는 들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죠. 시간이 좀 걸렸지만 결국은 썼어요(웃음).”
진행자가 되겠다는 것도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너의 목소리는 백만 불짜리”라고 칭찬했던 중학교 국어선생님의 말은 그에게 자신감을 선물했다. TV에 출연하는 왕영은씨를 보며 미래를 꿈꿨다.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그는 지금 꿈을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꿨으면 좋겠어요. 거창한 거 말고. 애들 진학 문제, 아파트 평수. 정말 그것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좀 아깝지 않나요?”
당장 쓸 말이 없어도 관계없다. 공책을 준비하는 순간 ‘계기’가 된다. 하루에 10분 정도는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카피는 빈말이 아니다. 기록은 당신의 일상과 꿈을 지배하기도 한다.
‘아줌마’라면 지금부터아줌마라는 말이 갖는 독특한 지위는 한국 사회만의 특성이다. 언제부터인가 아줌마는 억척스러움과 뻔뻔함을 대표하는 ‘족속’이 됐다. 그 뻔뻔한 억척스러움이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든든한 자산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줌마는 ‘아기 주머니를 가진 사람’이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자궁 없는 여자 있나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아줌마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죠. 넘치는 ‘아줌마의 열정’을 너무 한곳에
집중하는 것 같아요.”
결혼과 동시에 꿈을 반납한 우리 아줌마들은, 갈 곳 없는 열정을 남편과 자식에게 쏟는다. 그러나 선거 유세장에서 유니폼을 입고 ‘율동’을 하는 사람 중에는 유난히 아줌마가 많다. 집회나 시위 현장도 마찬가지다. 긍정적이든 아니든, 아줌마의 사회 참여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작은 증거다.
“그 에너지를 자신에게 집중하고, 여유가 있다면 주변에 나눠주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니까, 안타깝죠. 저처럼 일하는 엄마는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하기도 해요(웃음).”
‘엄마들의 커뮤니티’에 일하는 엄마가 끼어들기는 쉽지 않다. 하루를 온전히 아이를 위해 투자하는 엄마에 비해 아이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의 생각보다 성숙하다. 일일이 떠먹여주는 아이보다, 자유롭게 자란 아이가 야무지다.
“한번은 제가 아는 어떤 선생님의 아이가 학교에서 말다툼을 했어요. 반장과 다투던 아이였는데, ‘니네 엄마 담배 피우더라’ 그랬대요. 기를 죽이고 싶었던 거죠(웃음). 그랬더니 그 아이는 ‘니네 엄마는 담배도 못 피우냐?’ 그랬대요. 그러고 집에 와서는 엄마한테 `‘`웬만하면 담배 좀 끊으라'고 하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야무져요.”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 집, 내 가족, 내 아이에 집중하는 아줌마의 일상에 ‘자신’이 없다는 것은 끔찍한 아이러니다.
“나만 아는 아이들이 나중에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아줌마들이 너무 반목을 한다는 비난 아닌 비난을 받고 있어요.”
그는 두 명의 아이를 둔 엄마다. “엄마가 언제 가장 좋으냐”고 물으면,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 나올 때가 가장 좋다”고 말하는 속 깊은 아이들이다.
이런 얘기, 백날 하면 뭐 하나?
서점에는, ‘긍정적으로 살라’는 사람이 너무 많다. 똑같은 말을 건네는 책이 수십 권인데도 꾸준히 팔린다. 같은 주제를 자기 말로 변주할 줄 아는 사람은 지금 당장 책을 한 권 쓰는 게 돈 버는 길이다.
“그렇죠, 말은 쉬워요. 하지만 실천이 어려우니까 같은 책들이 계속 팔리는 거겠죠. 하지만 그 책들이 무슨 말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나’라고 생각해요.”
일 년 내내 행복한 것은 비정상이다. 매일 낮만 있는 하루는 끔찍하다. 긍정의 힘은 매일 행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절망했을 때, 헤어날 수 없을 때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이다.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받아들이는 힘이다. ‘나타니엘이여, 비를 받아들이자’고 적었던 전혜린처럼, 나를 자극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는 방법이다.
“완벽한 행복은 없습니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감사하고 사는 것이 좋은 거죠. 뭘 읽거나 들어서 내가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에요.”
5년 전, 남편이
부도를 맞아 빚더미에 앉았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광기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명상을 했다. 누군가의 조언이었다. 당연히 효과는 없었다. 조언했던 선생님께
전화해서 따졌다. “하나도 나아지는 게 없다, 효과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3년을 하고 나니까, 나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았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정리도 많이 됐지만, 끓어오르는 화를 효과적으로 가라앉히는 법을 터득한 거죠.”
최광기의 강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었던 소소한 경험이나 일상의 이야기를 전한다. 습관이 변하면 삶이 변한다는 것도 그는 직접 체험했다. 가만 있으면 화난 것 같은 인상을 바꾸려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볼 때마다 웃기 시작했다. ‘난 예쁘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코웃음 치고 웃어넘길 수도 있는 말이지만, 효과를 톡톡히 봤다.
“광기(狂氣)가 돌기 시작한 거지. ‘성격 좋게 생기셨어요’라는 말이 듣기 싫었어요. 차라리 말을 하지 말든가(웃음). 그러고 몇 달이 지나니까 만나는 사람들이 표정이 달라졌다고 해요. 성형 수술 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최고의 찬사’죠. 하하하.”
최광기의 강의는, 직접 먹어보고 효과를 톡톡히 본 다이어트 식품 같은 거다. 혼자만 효과 보기 아까워서 몰래 전해주는 언니, 혹은 누나의 마음이다.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우울하면 풀고 사는 사람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다 털어내지 못하니까 우울한 거죠. 그걸 해소하도록 돕고 싶을 뿐이에요.”
지금 최광기는 많이 아프다. 성대결절은 오래됐고, 과로로 기력이 쇠한 상태다. 힘들지만 쉰다고 나아질 일은 아니다. 두 사람이 와인 한 병을 비우고 나서 그는 “이런 날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마흔이라는 나이도 너무 행복하다”는 이 여자는, 진심으로 오후를 즐길줄 알았다.
■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원상희
■장소 협찬 / 길들여지기(정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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