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며2013. 2. 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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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철학

성적 사랑을 넘어서는 원동력은 '미'인가

지금까지 알아본 내용에 따르면 에로스는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는, 한편으로는 남녀 간의 육체적, 성적 결합 욕구로 나타나는 '성적 사랑' '감각적 사랑'인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자가 무지를 자각하고 지를 갈구하는 '지에 대한 사랑' '지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 '동일한 하나의 개념'이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지니지만, 두 가지 의미는 모두 인간 삶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에로스의 상반되는 의미를 서로 연결하여 내적 연관성을 마련할 가능성은 없을까? 이런 가능성을 꿈꾼다는 자체가 마치 억지를 부리는 것 같다.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지에 대한 열정'이 떠오르는가?"와 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지에 대한 사랑'이 '남녀의 성적 사랑'과는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남녀의 사랑은 육체적-성적-감각적 사랑이 기본 출발점이다. 남녀는 서로의 육체를 탐하다가, 2세가 생산되면 마치 사랑의 사명을 다한 것처럼 살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의 에로스는 성적 사랑과 동일하지 않은 측면을 담고 있다.

에로스 신의 탄생 배경을 상기하면, 철학자 역시 '남녀 간의 성적 측면'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성적 사랑'을 넘어서는 단초를 지니고 있다. 철학자가 느끼는 결핍이나 결합 욕구에는 '영원성'과 '지속성'이 결핍된다는 자각이 동시에 동반되기 때문이다. 영원성과 지속성은 인간의 육체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 모두에서 요구되는 무한성이다. 육체는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유한성을 지닌다. 이것은 영원성과 지속성에 대한 결핍감을 낳는다. '유한한 육체'의 '일시성'과 '단절성'은 '유한한 육체를 보존하고 지속시키고자 하는 욕구'로 발전한다. 즉, 궁극적으로 '자신의 종'을 보존하고자 하는 '2세 생산 욕구'로 승화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유한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정신력의 한계'를 자각한다면 그리고 지식의 결핍을 자각한다면, '정신의 영원성과 지속성을 보존하기 위한 욕구'를 갖게 되고, '지식을 생산하고 싶은 욕구'와 '지식을 보존하고 싶은 욕구'를 발휘하게 된다. 철학자가 느끼는 영원성과 지속성은 지식에 대한 욕구를 낳으며, 지식에 대한 욕구는 이데아에 대한 상기와 파악으로 귀결된다.

이때 철학자가 지식의 결핍을 느끼고 무지에 대해 자각하는 것은, 마치 머릿속에 어느 날 갑자기 섬광이 비치듯이 불현듯 이데아 세계가 떠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 이데아 세계를 상기하도록 만드는 어떤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감각계에 존재하는 특수한 대상들을 보고, 듣고, 감지할 때, 특수한 감각 대상들을 존재하도록 하는 근거이면서 '지식의 원형'이 되는 '보편성' 내지 '본질'을 이성 능력에 의해 상기하게 된다. 철학자로 하여금 지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발휘하게 하고 이데아를 상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감각적 자극'이다. 그러면 이제 감각적 자극과 감각적 계기가 이데아를 상기하도록 하는 것과, 성적 사랑을 넘어서서 정신적 사랑을 야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즉, '성적 사랑'과 '지에 대한 사랑'의 연관성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이 '미'에 대해 환호하는 차원으로 되돌아가보자.

사람들이 '아름다운 대상'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를 보면서 환호하는 것은 일단은 '성적 사랑의 감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아름다운 육체를 감각하면, 성적으로 결합하고 싶은 '감각적 욕구'가 생긴다. 상대방이 지닌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그러나 감각적 미는 금방 시들어버린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몇 주를 지속하지 못하고 떨어져버리고,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도 시간이 지나면 쪼글쪼글 주름이 생기면서 흉해진다. 젊은 시절의 화려했던 모습도 끝내는 사라지기 때문에, 육체의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이 아무리 탁월해도- '영원성'과 '지속성'이 결여된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정신적 측면과 별개이기 때문에, 육체의 감각적 아름다움이 영혼의 지속적인 울림을 담아낼 수는 없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미인을 선호하는 것이나, 감각적 아름다움이 성적 결합 욕구를 극도로 자극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성적 욕구는 일단 충족되면 육체적 만족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상대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상대와의 성적 결합과 성적 욕구에 '탐닉'하는 사람은 심신이 지치며, 때로는 정신적인 자기계발을 스스로 방해하기도 한다. 감각적 아름다움에 집착하면, 온 정신이 성적인 것에 얽매이게 되고, 더욱더 육체적 쾌락에만 탐닉하는 악순환이 발생하면서 창조력과 상상력이 고갈된다.

그러므로 성적 사랑이 영혼을 일깨우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려면 감각적 아름다움 이상의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성적 결합 욕구가 감각적 아름다움에서 자극받았다고 해도, 성적 사랑을 초탈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성적 사랑을 초탈하려면, 감각적 미를 경험할 때 인간 영혼을 동요시키고 영혼의 울림을 야기할 만한 어떤 것, 즉 감각적인 것이 담보해낼 수 없는 영원성과 정신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감각적 미'가 '정신성'을 상기시키고 '정신적 미'를 상기시켜야 한다.

정신적 미는 성적 결합 욕구 이외의 다른 측면을 야기한다. 정신적 미는 정신성에 대한 감탄과 지성적-이성적 차원에 대한 파악을 동반함으로써, 나의 지적 상태를 되돌아보게 하고 지적 결핍과 불완전함을 반성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결핍을 해소하고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발생하는데, 이것은 곧 지적 탁월성을 지닌 사람과 지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욕구로 나타난다. '지적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지식과 진리를 풍부하게 지닌 사람과 자주 만나고, '정신적 대화'를 나누면서, '정신적 교감'을 하는 것이다. 정신적 교감을 하는 가운데 상대방과 지적 능력이 유사해질 수 있으며, 또 유사해지고 싶은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인간적 만남과 대화는 지속된다. 이렇듯 지적으로 결합하고 싶은 욕구가 '정신적 사랑'의 감정이다.

정신적 사랑을 통해 인간이 지닌 이성 능력이 계발되며 창조력과 상상력- 지적 상상력이든지 예술적 상상력이든지 간에- 이 활성화되면서 영혼의 울림이 야기된다. 정신적 사랑은, 플라톤이 에로스를 설명할 때 제시하는 '지에 대한 사랑'과 '무지를 해소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그 가능성을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때로 '정신적 사랑'은 '플라톤적 사랑(platonic love)'으로 일컬어진다.

철학자도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에 경탄하고, 그 육체와 성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성적 에로스를 지닌다. 그러나 철학자는 자기에게 성적 결합 욕구를 야기한 앞의 육체와 '동일한' 아름다움 또는 '유사한' 아름다움이 다른 육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반복하면서 '한 육체의 미'는 '다른 육체의 미'와 유사하다는 데에 도달하고, 게다가 '다른 육체의 미'뿐만 아니라 '그 밖의 육체'에서도 동일한 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자는 동일하게 또는 유사하게 아름다움을 지니는 다른 것들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향유하려 하며, 철학자는 점차 '모든 육체의 미'가 유사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모든 육체의 미를 파악하는 것은, 곧 '미의 공통성과 보편성'에 대한 개념적 파악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미의 유사성은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게서도 발견된다. 사람들은 꽃, 새, 나무, 돌산 등을 감각할 때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보유하는 아름다움의 유사성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들 중 동일한 종류의 대상이라면 어떤 것은 아름답고, 어떤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쉽게 감지된다. 꽃의 종류에도 인간에게서 언급했던 미의 공통성과 미의 보편성이 있을 것이고, 새의 종류에도 미의 공통성과 미의 보편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형이 현격하게 다른 대상들 간에는 동일하게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측면을 쉽게 감지해내기가 어렵다. 가령 꽃의 아름다움은 다른 꽃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있고 양자의 일치성을 논할 수 있지만, 꽃의 아름다움과 새의 아름다움은 어떤 면에서 비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꽃의 아름다움과 꾀꼬리의 지저귐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비교한다면, 이들은 시각 경험과 청각 경험 간의 비교이니, 같은 시각 경험을 가지고서 비교하는 것과는 또 다른 어려움이 발생한다.

그러나 인간, 꽃, 새와 같이 서로 현격하게 다른 대상들이 갖고 있는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동일하게 '미'라는 맥락에서 판단할 수 있는 어떤 기준 내지 원형, 즉 서로 다르고 차이가 있는 것들을 동일한 아름다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본질' 내지 '아름다움의 원형'이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본질인 '미의 이데아'가 바로 서로 다른 대상들에 공통적으로 관철되는 '미의 공통성'과 '미의 보편성'의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공통성과 보편성은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감각적 시각 능력을 통해 파악되는 대상은 모두 개별적이며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점을 지니기 때문에, 감각 대상으로부터 동일성을 도출해내려면 먼저 감각적 차원에서 유사성과 공통성이 경험되어야 한다. 그 대상이 다른 대상과 다르다고 할 만한 차이점과 개별성이 관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동일하게 파악하려면 공통성의 '본질적 특징'이 개입하고 있어야 한다. 그 특징을 개념화한 것이 '원형' '본질' '이데아'이다.

아름다움의 본질, 즉 미의 이데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감각 대상에서 미를 경험하면서 동시에 모든 육체의 미가 동일하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개념적 장치인 '미의 이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개념은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 정신적 능력을 통해서 파악된다.

정신적 능력을 지닌 인간이라면, 즉 감각적 능력 이상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능력을 지닌 인간이라면, 성적 욕구에서 해방되어, 시들지 않는 미의 보편성인 '정신적 미'를 발견하게 된다. 정신성은 인간 육체로부터 감각적으로 자극을 받지만, 감각적 차원을 넘어서는, 즉 육체적 차원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활동'과 '아름다운 학문'으로 나아간다. 활동과 학문은 감각적 아름다움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며, '감성'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다. 인간들이 아름답다고 인식하는 활동과 학문에는 아름다움의 본질인 '미의 이데아'가 분유되어 있고, 미의 이데아를 닮아 있는 '아름다운 활동'과 '아름다운 학문'은 '미의 이데아'를 상기시킨다.

미의 이데아는 철학자가 지속적으로 갈망하면서 획득하기를 원하는 '진리와 지혜의 이데아'이기도 하다. 이데아는 '존재하는 것들'(존재자)의 보편성이고, 이 보편성은 인간 이성이 파악하고자 하는 지식의 원형이다. 세상에 널려 있는 존재자가 다양하듯이 존재자의 원형이 되는 이데아도 다양하다. 즉, 이데아에 해당되는 지식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다양한 지식을 내적으로 관계지워주고, 모든 지식을 하나의 체계로 통일시켜주는 근거에 해당하는 지식이 필요한데, 플라톤은 이것을 미의 이데아라고 부른다. 미의 이데아는 모든 미의 원형이며, 모든 지식의 '원형'이고 '지식의 원형의 원형'이다. 미의 이데아는 모든 이데아들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다. 모든 지식의 원형이면서 모든 지식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기 때문에, 미의 이데아는 진리의 이데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미에 대한 욕구는 진리와 지혜의 원형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철학자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지에 대한 결핍을 해소하려고 하는 욕구, 즉 '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에로스'를 발휘하는 것은 아름다운 대상을 감각할 때이다. 아름다운 대상을 볼 때 인간의 마음에 정신적 동요가 일어나며, 이것은 미의 이데아를 인식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작용한다.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환호하는 것은 진리의 이데아를 인식하고자 하는 열정이다.

에로스는 미의 원형에 도달할 때까지, 인간의 영혼과 이성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에로스가 감각적-성적 사랑에서 이성적-정신적 사랑으로 승화되는 힘이라는 것은, 철학자가 순수한 지의 세계인 이데아계로 고양되는 도정에서 드러난다. '성적 사랑'에서 '정신적 사랑'으로의 이행은 철학자의 학문적 열정을 작동시키는 힘이고, 철학자를 지와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힘이다. 이렇듯 '정신적 사랑'은 성적 사랑과 감각적 육체에 탐닉하는 심정이 놓쳐버릴 수 있는 영원성과 지속성을 담고 있으며 영원한 지식체계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아름다운 활동'과 '아름다운 학문'은 진리의 이데아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으며, 미의 이데아는 진리의 이데아이다. 게다가 진리는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와 관련을 맺게 되므로, 진리의 이데아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활동의 원천이며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 가치 판단의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은 '선'이다. 그래서 플라톤에게 행위와 가치 판단의 기준은 선의 이데아이다. 진리의 이데아는 행위 및 실천과 연관이 있으므로, 진리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이기도 하다.1)플라톤에게 선의 이데아는 진리의 이데아이고, 진리의 이데아는 미의 이데아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선·미는 근본적으로는 통일되어 있다. 미를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지니는 대상을 선호하는 것은, 플라톤에게는 '선에 대한 추구'이며 '선을 지니는 대상을 선호하는 것'과 동등한 위상을 지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진·선·미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진리를 다루는 영역(철학 내지 종교)과, 선을 다루는 영역(윤리학 내지 실천 철학)과, 미를 다루는 영역(미학 내지 예술)은 서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러므로 진·선·미를 분리하고 그에 상응하는 독자적 학문 분야를 구축하면서 '학문의 분류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철학자는 진·선·미가 미의 이데아로 또는 선의 이데아로 통일된다는 플라톤의 입장을 좀더 신중하게 다룬다. 왜냐하면 진·선·미의 통일을 경험적 맥락에 적용하면 서로 구분되는 영역을 모호하게 섞어버릴 위험이 있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미녀는 도덕적'이고, 아름답지 못한 '추녀는 비도덕적'이라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의 자율성과 미의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근대의 미학적 노력을 무산시킬 위험 요소도 있기 때문이다.

각주

  1. 1) Platon, Symposion, 209a-212 참조.

Posted by Songswann